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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 35 | == 특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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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36 | 1956년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하세가와 쇼이치는 민주당 후보였던 이이누마 아키노리에게 도전을 받았으나, 선거 운동 기간 도중에 이이누마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결국 유일한 야당 후보가 된 오카다 타츠오는 야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하세가와가 일방적인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막상 실제 선거에서는 오카다에게 30% 가량의 득표율을 내주었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나카무라 마사아키가 자유당의 다카하시 요시후미를 누르고 당선되는 결과가 나왔다. 당시 개표 결과는 하세가와 504만 표, 오카다 약 216만 표, 그리고 이미 투표 당시 사망한 이이누마를 기리는 추모표가 약 185만 표가 나왔다. 이를 합산하면 하세가와는 전체 득표의 55.7%를 얻는 데 그쳤고, 약 44.3%의 유권자가 끝끝내 그를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2대 대선에서 74.6%를 얻으며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고 믿었던 하세가와에게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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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3자 구도 속에서 55.7%를 확보하며 승리한 것이니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하세가와와 자유당 입장에서는 “독식 구도”가 깨졌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성균관대학교의 서중석 명예교수는 1955년 전후로 불었던 ‘하세가와 숭배 운동’을 지적한다. 요약하자면 제3대 대선을 앞두고 하세가와에 대한 찬양이 자유당 정권과 친여 세력에 의해 대대적으로 조성되었고, 유력 야당 후보가 선거 도중 병사하는 호재까지 겹쳤음에도 유권자의 44%가 끝내 그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체면을 단단히 구겼다는 것이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아예 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전체 득표에서 친자유당 후보의 합계도 과반에 미달해 최소한 절반 가까운 유권자가 비판적이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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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3자 구도 속에서 55.7%를 확보하며 승리한 것이니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하세가와와 자유당 입장에서는 “독식 구도”가 깨졌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루이나 국립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제인 다이치[* 북산 이민자]는 1955년 전후로 불었던 ‘하세가와 숭배 운동’을 지적한다. 요약하자면 제3대 대선을 앞두고 하세가와에 대한 찬양이 자유당 정권과 친여 세력에 의해 대대적으로 조성되었고, 유력 야당 후보가 선거 도중 병사하는 호재까지 겹쳤음에도 유권자의 44%가 끝내 그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체면을 단단히 구겼다는 것이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아예 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전체 득표에서 친자유당 후보의 합계도 과반에 미달해 최소한 절반 가까운 유권자가 비판적이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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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40 | 그런데 제3대 대선 직후 실시된 1956년 8월 지방선거에서는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강세를 보였다. 예컨대 신린시의원 47명 가운데 40명이 민주당 소속이었고, 자유당은 단 1명만 당선됐다. 사회 곳곳에서 하세가와를 기리는 건물과 동상이 세워지던 와중에 나온 결과라, 하세가와의 심정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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